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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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는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평양 2.8 문화회관에서 열린 당대회이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김정일을 공식화하고, 주체사상을 강조하며 사회주의 건설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당 규약 개정을 통해 정치국 내 상무위원회를 창설하고, 제6기 중앙위원회를 선출하여 당내 세대교체를 시도했다. 대회에서는 조국 통일을 위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설립을 제안했으며, 3320명의 대의원과 158명의 발언권자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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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 | |
---|---|
행사 개요 | |
행사 명칭 |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 |
영문 명칭 | 6th Congress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
개최 장소 | 2월 8일 문화회관, 평양, 북한 |
개최 기간 | 1980년 10월 10일 ~ 1980년 10월 14일 (4일) |
참가자 | 3,062명의 대표자 |
주요 결과 | 제6기 중앙위원회 선출 제6기 중앙감사위원회 선출 |
관련 이미지 | |
2. 당대회
제6차 당대회 당시 조선로동당의 당원은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북한 전체 인구의 약 17%에 해당한다. 당세포는 약 30만 개였다. 제6차 당대회에는 3,320명의 대의원이 참석했고, 이 중 158명이 발언권을 가졌다.
2. 1. 주요 당대회
대회 | 개최 년도 |
---|---|
제1차 대회 | 1946년 |
제2차 대회 | 1948년 |
제3차 대회 | 1956년 |
제4차 대회 | 1961년 |
제5차 대회 | 1970년 |
제6차 대회 | 1980년 |
제7차 대회 | 2016년 |
제8차 대회 | 2021년 |
2. 2. [[조선로동당 대표자회|대표자회]]
1980년 당시 조선로동당의 당원은 대략 3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는 북한 전체 인구의 약 17%에 해당한다. 당세포는 약 30만 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6차 당대회에는 3320명의 대의원이 참석했고, 이 중 158명이 발언권을 가졌다.3.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제6차 당대회]] (1980년)
제6차 당대회는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2.8 문화회관에서 열렸으며, 10월 11일에는 휴식 시간이 있었다.[1] 투표권을 가진 대표 3,062명과 투표권이 없는 158명이 참석했는데, 이는 제5차 당대회보다 크게 증가한 수치이다.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을 포함하여 118개국에서 온 177개 대표단이 참석했다.[1]
개회사, 집행부, 비서국, 자격심사위원회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당대회 의제가 결정되었다.[1] 주요 의제는 다음과 같았다.[1]
# 당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
# 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 평가
# 당 규약 수정
#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발언권을 가진 대표 중 39명이 토론에 참여했는데, 이는 제5차 당대회에 비해 낮은 참여율이었다.[1] 토론 참가자는 대부분 당 관료와 기술관료였으며, '혁명 세대'는 없었다.[1] 토론 주제는 경제(21개), 정치(10개), 사회 및 문화(5개), 군사(1개), 대한민국과의 통일(1개) 등이었다.[1]
제6차 당대회는 김일성이 결정된 사항을 요약 발표하며 마무리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3. 1. 배경
6차 당 대회 준비 과정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회의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당 규범에서 벗어나 제5차 당 대회(1970년) 이후 10년 만에 소집되었다.[1] 공식적으로 연기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일성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1970년대 대부분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에 대한 지지를 모으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 또한, 당 조직과 기능 재편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1] 제6차 당 대회의 주요 목적은 김정일을 김일성이 선택한 후계자로 공식화하는 것이었다.[1]3. 2. 주요 내용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2.8 문화회관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는[1], 당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 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 평가, 당 규약 수정,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를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10월 11일은 휴회였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화하며 당내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제6기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248명(정위원 145명, 후보위원 103명)이 선출되었는데, 이는 제5기 중앙위원회보다 76명 늘어난 수치다. 중앙위원회 위원 1명이 당원 1만 명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확대는 당의 성장을 의미한다. 제1기 중앙위원회 이후 김일성과 김일만이 중앙위원직을 유지했다. 당 규약 개정으로 정무위원회는 정치국으로 명칭이 환원되었고, 상무위원회가 신설되었다.
김영주는 김일성의 첫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제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과 중앙위원회 직위를 모두 잃었다. 1974년부터 '당중앙'으로 불린 김정일은 북한 내 권력 서열 2위로 부상했다.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은 김일성의 왕조 구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김일성은 당 대회에서 조국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강조하며, '고려민주연방공화국(DCRK)' 설립을 제안했다. DCRK는 남북 동수의 대표로 구성된 최고민족연방회의(SCNC)가 통치하고, 남한은 자본주의, 북한은 사회주의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제6차 당대회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우선시하며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을 보였다. 대외 관계에서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대신 독립적인 국가 정책을 강조했다. 민주집중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수령론에 기반한 일인 지도 체제가 강화되었다.
1966년 당 대표자회에서 이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제6차 당대회에서 이러한 결별은 더욱 명확해졌다. 김일성은 제3세계 국가와의 관계를 사회주의 진영과의 단결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3. 3. [[조선로동당 제6기 중앙위원회|제6기 중앙위원회]] 구성
제6차 당대회 직후 열린 제1차 전원회의에서 제6기 중앙위원회가 선출되었다.[1] 중앙위원회는 정위원 145명과 후보위원 103명, 총 248명으로 구성되었다.[1] 이는 제5차 당대회에 비해 76명 증가한 것이다.[1] 중앙위원회 위원 1명이 당원 10,000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중앙위원회의 확장은 당의 확장을 의미한다.[1] 248명의 위원 중 139명(정위원 60명, 후보위원 79명)이 중앙위원회에 처음 진입했다.[1] 그러나 이전 중앙위원회에 비해 교체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41.4%, 제5차 당대회에서는 72.2%).[1] 제1기 중앙위원회 이후 김일성과 김일 두 명만이 중앙위원회 위원직을 유지했다.[1]제6차 정치국은 정위원 19명, 후보위원 15명, 총 34명으로 구성되었고,[1] 이 중 5명이 주석단에 선출되었다.[1] 김정일은 정치국과 주석단 서열에서 4위에 올랐다.[1] 제6차 비서국은 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김정일은 2위에 올랐다.[1] 김일성과 김중린만이 제5차 비서국에 이어 재선출되었다.[1] 제6차 중앙군사위원회는 1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김정일은 김일성과 오진우에 이어 3위에 올랐다.[1] 김일성과 김정일은 주석단, 정치국, 비서국, 중앙군사위원회 등 4개 기구 모두에 자리를 가진 유일한 인물들이었다.[1]
주석단, 정치국 정위원 및 후보위원, 비서국 및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의 명단 및 서열은 다음과 같다.[1]
기호 | 의미 |
---|---|
‡ | 조선로동당 정치국 주석단 위원 |
# | 정위원 | 후보위원 | 비서국 위원 | CMC 위원 |
---|---|---|---|---|
1. | ‡김일성 | 허담 | ‡김일성 | ‡김일성 |
2. | ‡김일 | 윤기복 | ‡김정일 | ‡오진우 |
3. | ‡오진우 | 최광 | 김중린 | ‡김정일 |
4. | ‡김정일 | 최세웅 | 김용남 | 최현 |
5. | ‡리종옥 | 최재우 | 김환 | 오백룡 |
6. | 박송철 | 공진태 | 연형묵 | 전문섭 |
7. | 최현 | 정준기 | 윤기복 | 오극렬 |
8. | 림춘추 | 김철만 | 홍시학 | 백학림 |
9. | 소철 | 정경희 | 황장엽 | 김철만 |
10. | 오백룡 | 최영림 | rowspan="10" style="background:#aaa;"| | 김강환 |
11. | 김중린 | 소윤석 | 태병렬 | |
12. | 김용남 | 리근모 | 리을설 | |
13. | 전문섭 | 현무광 | 주도일 | |
14. | 김환 | 김강환 | 리두익 | |
15. | 연형묵 | 리선실 | 조명록 | |
16. | 오극렬 | rowspan="5" style="background:#aaa;"| | 김일철 | |
17. | 계응태 | 최상욱 | ||
18. | 강성산 | 리봉원 | ||
19. | 백학림 | 오룡방 |
제1차 전원회의에서 "혁명 1세대"는 집행 직위에서 물러나 김정일의 새로운 세대에게 양보했지만, 여전히 최고 권력 기구인 주석단과 정치국을 장악했다.[1] 김영주 (김일성의 동생, 김정일 이전의 후계자로 여겨짐), 김동규, 류장식, 리용무는 주요 당직에서 사라졌다.[1] 숙청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일성이 아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1]
3. 4. 평가
제6차 당대회는 조선로동당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주체사상''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 대외 관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보다 독립적인 국가 정책을 우선시했다. 정치 분석가 김남식은 "이러한 변화는 공산주의의 근본 원칙에서 현저한 이탈을 나타내며, 1980년대 북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고 평가했다.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공산당들과 달리, 조선로동당에서는 민주집중제가 지도자(조선로동당 총비서)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로동당이 지도자에게 책임을 지는 형태로, 이는 북한의 수령론에 기반한 특이한 체제였다.
조선로동당의 이념은 대중이 오직 지도자를 통해서만 혁명적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대중이 역사 발전을 주도한다는 정통 공산주의 신념과는 대조적이다. 북한에서는 "노동계급의 위대한 혁명 과업은 오직 수령에 의해 개척되고 승리로 이끌어지며, 수령의 지도 아래 완성된다"는 노선에 따라, 혁명 과업은 지도자의 책임이 되었다. 이러한 수령론은 일인 지도 체제를 지지하며,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명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을 창건하고 ''주체사상''을 창시한 "위대한 수령"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지위는 신성한 권리와 같았다.
1966년 당 대표자회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제6차 당대회에서처럼 명시적으로 결별한 적은 없었다. 1966년 이후 북한은 냉전에서 중립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국가적이고 독립적인 외교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김일성은 제3세계 국가와의 관계를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북한은 여전히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으며, 미국과의 관계는 냉랭했다.
4.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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